무난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正其衣冠尊其瞻視 潛心以居對越上帝 足容必重手容必恭 擇地而蹈 折旋蟻封
出門如賓承事如祭 戰戰兢兢罔敢或易 守口如甁防意如城 洞洞屬屬罔敢或輕
不東以西不南以北 當事而存靡他其適 惟心惟一萬變是監 從事於斯是曰持敬
정기의관존기첨시 잠심이거대월상제 족용필중수용필공 택지이도 절선의봉
출문여빈승사여제 전전긍긍망감혹이 수구여병방의여성 동동촉촉망감혹경
부동이서불남이북 당사이존미타기적 유심유일만변시감 종사어사시왈지경
의관을 바르게 하고, 보는 것을 엄격하게 하라. 마음을 차분하게 해 생활하되
마치 상제를 대하듯 하라. 발걸음은 무겁게 하고 손 모양은 공손하게 하며
땅을 밟을 때 가려서 개미 뚝도 돌아서 가라. 문밖에 나가 사람을 대할 때 귀한
손님을 대하듯 하고, 일을 행할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 경건히 하며, 조심하고
삼가 혹시라도 함부로 하지 마라. 입을 지키기를 병마개처럼 하고, 뜻을 지키기를
성문과 같이 하며, 삼가고 조심해 혹시라도 가벼이 하지 마라. 동으로 가다가
서로 가지 말며, 남으로 가다가 북으로 가지 마라. 일을 당해서는 마음을 보존해
다른 곳으로 가지 마라. 오직 한마음으로 온갖 변화를 제대로 살펴라.
이렇게 함을 ‘삼감을 보존한다 (지경持經)’라고 한다. <주자>
주희朱熹는 중국 송시대 철학자로 주자로 높여서 부른다. 성리학은 주자학朱子學
으로 불릴 정도로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주자는 공자와 맹자 등 유가
학자들의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사상적인 약점을 보완하고, 형이상학적인 체계
를 확립해, 성리학을 완성했다. 특히 그의 학문은 단지 중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서는 지식인으로서의
학문일 뿐 아니라 지배계층의 학문으로 나라의 경영과 통치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인 심학心學에 대해 완전히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본격
적인 학문적 논의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훗날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조선의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앞의 글은 주자의 ‘경재잠敬齋箴’ 가운데
일부로 경재잠은 마음을 삼가고 경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주자는 이 글을
자신의 서재에 붙이고 항상 읽으며 일상의 삶을 돌아보았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우선 몸가짐부터 정돈하라
주자가 여기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것, ‘의관을 바르게 하고, 보는 것을 엄격
하게 하라’는 바로 겉모습을 단정히 하는 것이다. 몸이 비록 마음에 의해 움직
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반응은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 역시 맑은
상태를 유지 할 수 있다.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겉모습이 단정하게 드러나지만,
겉모습이 깨끗해야 마음 역시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마음과 몸을 지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 문장은 <논어><요왈>에도 실려 있다. 제자 자장子張
이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어때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던 말이다.
공자는 정치인으로서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미덕을 이야기해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것’으로, 그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의관을 바르게 하고 보는 것을 엄격하게 하는 것이다. 올바른 복장과 엄숙한
눈빛은 위엄이 있는 이미지를 드러내는 외양이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이 그를
보며 어려워하게 되는데, 거칠고 위압적으로 하지 않아도 위엄을 지키는 모습
이다. ‘마음을 차분하게 해 생활하되 마치 상제를 대하듯 하라’는 평상시 가져야
할 마음 자세다. 마치 하늘의 임금을 대하듯이 생활하는 것이니 진실해야 하며
평안하면서도 엄숙해야 한다.
‘땅을 밟을 때 가려서 개미 뚝도 돌아서 가라’는 걸을 때의 자세다. 개미 뚝은
원문으로 의봉蟻封이라고 하는데, 개미가 구멍을 파서 울퉁불퉁한 작은 봉우리
같은 모양이다. 이곳을 밟게 되면 몸의 균형을 잃게 되고 절도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 이런 세세한 것까지 지킬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말
그래도 해석할 것이 아니라 평상시 지켜야 할 삶의 자세로 삼으면 된다.
<여씨춘추>에는 “사람들은 산에 걸려 넘어지지 않지만 개미 뚝에 걸려 넘어진다’
라고 실려 있다. 크고 중요한 일에 집중하면서 작고 사소한 일은 경시하는 사람
들을 깨우치는 글이다. 모든 큰일은 작은 일을 소홀히 함으로써 일어나기에 큰
일을 하고 싶다면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람의 미래는 평상시의 모습
에서 드러난다.
매사에 전전긍긍하며 쉽게 마음을 바꾸지 마라
‘문밖에 나가 사람을 대할 때 귀중한 손님을 대하듯 하고, 일을 행할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 경건히 하라’는 것은 사회생활을 할 때 취해야 하는 자세다.
<논어><안연>에서 공자가 제자 중궁仲弓에게 인仁을 가르친 말 중에 있다.
일과 생활에서 만나는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을 마치 두려워 떨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문의 ‘조심하고 삼가라’의 원문은 전전긍긍戰戰兢兢이다. ‘몹시
두려워하고 벌벌 떨며 조심함’의 뜻인데, 그 어원은 <시경><소아小雅>에 나오는
‘소민小旻’이라는 시다. 폭군과 간신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는 당부다.
이 구절은 <논어><태백>에서 병상에 누워 있던 증자가 인용함으로써 잘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상하게 되면 큰 불효로 간주했다. 그래서
몸을 아끼기를 ‘두렵고 삼가기를 마치 못가에 서 있듯, 살얼음을 밟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증자 자신은 이제 임종의 때가 가까웠으므로 그런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어 홀가분하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말했다.
다음으로 “입을 지키기를 병마개처럼 하고, 뜻을 지키기를 성문과 같이 하라
(수구여병방의여성守口如甁防意女城)”는 주문공이 했던 말로 주자가 인용해서 썼다.
<명심보감>에도 실려 있는데, 말을 신중하게 하고 한 번 세운 뜻은 쉽게 꺾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신중하게 하는 것은 군자의 필수
요건이다. 말은 속에 지니고 있는 뜻을 바깥에 공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의
신중함은 머릿속에 있는 뜻과 바깥에 공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의 신중함은
머릿속에 있는 뜻과 생각의 신중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가벼운 사람은
그만큼 생각이 가벼운 사람이며, 쉽게 말을 어기고 함부로 생각과 의지를 바꾸는
사람이다. 따라서 옛 선비들은 특별히 말의 가벼움을 경계했다. 공자는 심지어
“먼저 실천한 다음 그에 따라 말해야 한다.
(선행기어이후종지先行其言而後從止)”라고 말할 정도였다.
“동으로 가다가 서로 가지 말며, 남으로 가다가 북으로 가지 마라.
일을 당해서는 마음을 보존해 다른 곳으로 가지 마라. 둘로 만들지도 말고,
셋으로 만들지도 말라”는 것은 오직 마음을 한결같이(주일主一)해 쉽게 변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으로 가다가 북으로 가지 마라’는 일을 할 때의 마음 자세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 일 저 일을 기웃거리다가는 어떤 일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수양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수양을 할 때는
오직 마음을 안정되게 하고 잡념이나 사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곳에도 마음을 쓰게 되면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나눠질 수 밖에 없다.
일이나 생활에서 하나로 마음을 두지 못하면 마음이 안정될 수 없고, 상황의
변화나 주위의 환경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악마는 마음을 놓친 찰나에 들어온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종합해 주자는 ‘삼감을 보존한다(지경持敬)’라고 정리했다.
몸과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는 모든 일들이 결국 삼감(경敬)에 달려 있고, 일을
이루기 위해 움직일 때나 수양을 위해 마음을 고요하게 할 때도 어겨서는 안
된다. 잠시라도 틈을 주지 말라는 것(수유지간須臾之間)은 단 한 순간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잠깐이라도 방심해 마음을 놓치게 되면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흔히 많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한다’라고 한다. 그럴 때는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
므로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없다. 주자는 이러한 상태를 ‘불길이 없어도 뜨거워
지고, 얼음 없이도 차가워진다’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짐작했겠지만 이 글은 주자가 <논어>를 비롯해 많은
경전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인용해 작성했다. 그 구절들은 특별한 도의
경지를 말 했다기보다는 일상에서 몸과 마음을 지켜 나가자는 권유다.
개인의 몸가짐에서부터 사람을 대하는 자세, 일에 임하는 마음가짐까지 평범한
일상에서 지켜야 할 법도다. 하지만 이러한 소소한 사건들이 조금이라도 어긋난
다면 천하가 뒤바뀌는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흔히 분야를 막론하고 위대함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비범하고 탁월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사람으로서 가늠할 수 없는 영감이 떠올라야
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남다른 비상함을 추구
하고, 새로움을 찾는 데 매진한다.
하지만 진정 위대한 경지는 남다른 것이 아니라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채근담>에는 “문장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기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스러울 뿐이다
(문장주도극처 무유타기 지시흡호 인품주도극처 무유타이 지시본연
(文章做到極處, 無有他奇, 只是恰好 人品做到極處, 無有他異, 只是本然)”
주자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평범한 일상에서 빈틈없이, 또 한결 같이
자신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권한다. 도를 얻기 위해 산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하루의 삶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오늘 하루를 겪으며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근본에 충실할 때 도를 이룰 수 있다. <논어>에서 말했던 ‘본립도생本立道生’이
바로 그것이다.
쉽게 이뤄진 것 같은 평범한 안에는
무수한 어려움을 거치며
형성된 비범함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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