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위정爲政-오여회언종일, 불위여우. 퇴이성기사, 역족이발, 회야불우

by TheEasyLife 2023. 5. 12.

<위정爲政> 2-9

子曰: "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자왈: "오여회언종일, 불위여우. 퇴이성기사, 역족이발, 회야불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안회와 더불어 온종일 이야기를 함에 내 말을 어기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더니, 물러간 뒤의 사생활을 살펴보건대 또한 충분히 발명(發明, 스스로 깨달아 실천함)하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구나."

*
()는 공자의 제자이니, 성은 안()이요, 자는 자연(子淵)이다. 불위(不違)는 의견이 서로 위배되지 않아 받아들이기만 하고 질문과 논란이 없는 것이다. ()는 한가로이 혼자 거처함을 이르니, 나아가 뵙고, 묻는 때가 아니다. ()은 말씀한 바의 이치를 발명(發明)함을 이른다.
*
내가 스승에게 들으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안자(顔子)는 자품이 심잠(沈潛)하고 순수(純粹)하여, 성인(聖人)에 대해서 체단(體段, 體裁)이 이미 갖추어졌다. 글하여 夫子의 말씀을 들음에 묵묵히 이해되고 마음에 깨달아져서 닿는 곳마다 (막힘이 없이) 환하여 스스로 조리(條理)있었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말씀함에 다만 어기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과 같음을 볼 뿐인데, 물러간 뒤에 그의 사사로이 거처함을 살펴보니, 일상생활에서 동()하고 정()하며 말하고 침묵하는 사이에 모두 충분히 부자(夫子)의 도를 발명하여 평탄하게 행해서 의심이 없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뒤에야 그가 어리석지 않음을 아신 것이다.

(
해설) 공자는 일찍이 자공이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한 데 크게 공감하며, 심지어 당신도 안회만 못하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안회도 스승의 가르침에 조금도 거스르지 않아 마치 어리석어 보였다고 하니, 진정 '대지약우(大智若愚',) 즉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는가 봅니다. 그것은 필시 안회가 문하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공자가 아직 그에 대해 잘 모를 때의 일일 것입니다. 《순자》<대략>편에 이르기를 "배우기에 능한 사람은 그 이치를 다 잘 안다. (善學者盡其理.")라고 했는데, 공자가 <선진>편에서 "안회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로다. 그는 내가 하는 말에 기뻐하지 않는 경우가 없나니"(11-4) 라고 한 것을 보면, 안회는 '선학자善學者'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안회는 "배우고 또 그것을 수시로 익히는'(1-1) 일상 속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한껏 발명함으로써 공자를 놀라게 했습니다. 공자가 <자한>편에서 "내가 일러주면 실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회뿐이겠지?"(9-20) 라고 감탄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공자는 여기서 당신의 가르침을 묵묵히 이해하고 깨달아 일상에서 일일이 실천하는 안회의 태도와 품성을 마음속 깊이 흡족해하며 칭송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의 보람과 즐거움이란 분명 이런 것이리라.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자왈: "시기소이, 관기소유, 찰기소안. 인언수재? 인언수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하는 바를 보며, 그 말미암은 바(이유)를 살피며, 그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본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느냐?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느냐?”

*
()는 위야(爲也, 하는 것)이니, ()을 행하는 자는 군자(君子)가 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소인(小人)이 된다.
*
()은 시()에 비하여 더 자세한 것이다. ()는 따름(부터)이다. 일은 비록 선()을 한다 하더라도 마음의 소종래(所從來, 所由來)가 善하지 못함이 있다면 또한 군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혹자가 말했다. “()는 행함이니, 그 하는 바를 실행하는 것을 이른다.”
*
()은 관()보다 더 자세한 것이다. ()은 즐거워하는 것이다. 소유래(所由來)가 비록 善하나 마음에 즐거워하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다면 또한 거짓일 뿐이니, 어찌 오래고서도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은 어찌이고, ()는 숨김이니, 거듭 말씀하여 깊이 밝히신 것이다.
*
정자(程子, 明道)가 말씀하셨다. “자신에게 있는 것(眞理)를 지언(知言)하고 궁리(窮理)한다면 이것으로써 남을 관찰하기를 성인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해설1) 공자는 <학이>편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할까 걱정하여야 한다."(1-16)고 하여, '지인知人', 즉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식견과 안목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공야장>편에서는 "처음에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믿었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에 대해 그의 말을 듣고도 그의 행실을 살펴보나니"(5-10)라고 하여, '지인'하기 위해서는 그 말보다도 행동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일깨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의 시비선악을 분별해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가 없다."(20-3)고 하여,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의 진의를 간파할 줄 알아야 함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
해설2) 이 장은 곧 '지인(知人)'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유념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동기나 의도가 순수하냐 아니냐고, 그 다음은 그 수단과 방법이 정당한가? 아니냐 입니다. 행위의 동기나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이 정당하지 않다면 비난을 면키 어렵습니다. 일찍이 공자가 "부귀함은 모든 사람이 다 바라는 것이나, 정당한 방법으로 얻지 않으면 군자는 그것을 누리지 않는다."(4-5)고 하고, "의롭지 못하게 부유하고 또 존귀함은 나에게 있어서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7-16)라고 한 것은 모두 같은 맥락의 가르침입니다.
한 사람의 위인을 평가하는 데 이상의 두 가지면 족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두 가지보다 더 핵심적이고 궁극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 따로 있으니, 곧 그 결과나 성과에 대해 진심으로 편안히 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주자가 이른대로, "그 수단과 방법이 비록 아무리 선()하더라도, 마음이 즐거운 바가 그에 있지 않다면 그 또한 위선(僞善)일 따름이니, 어찌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의 모든 단계가 다 무난하더라도, 그 결과나 성과에 진심으로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위선이라는 비판에 떳떳이 맞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공자가 일찍이 "거친 밥을 먹고 찬물을 마시며 팔베개하고 누워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나니"(7-16)라고 하였고, 안회 또한 편안히 안빈낙도하며 그 "즐거움을 다른 걸로 바꾸지 않았으니"(6-9), 두 분이야말로 진정 성인 군자의 비범한 품격의 소유자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