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공자-극기복례

by TheEasyLife 2023. 5. 16.

나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이다

 

其視箴曰 心兮本虛應物無迹 蔽交於前其中則遷 制之於外以安其內

其聽箴曰 人有秉彛本乎天性 知誘物化遂亡其正 卓彼先覺知止有定

其言箴曰 人心之動因言以宣 發禁躁妄內斯靜專

其動箴曰 哲人知幾誠之於思 志士勵行守之於爲 順理則裕 從欲惟危

기시잠왈 심혜본허응물무적 폐교어전기중즉천 제지어외이안기내

기청잠왈 인유병이본호천성 지유물화수망기정 탁피선각지지유정

기언잠왈 인심지동인언이선 발금조망내사정전

기동잠왈 철인지기성지어사 지사려행수지어위 순리즉유 종욕유위

 

먼저 보는 것의 잠언이다.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있어 사물을 대해도 흔적이 없다.

보는 것이 물욕으로 가리어지면 마음이 따라 떠나가니 밖을 제어함으로써 마음을

평안하게 해야 한다.

다음은 듣는 것의 잠언이다. 지성은 유혹에 이끌리면 물질에 동화되며 이로

인해 바른 도리를 잃게 된다. 그러나 탁월한 선각자들은 그 그쳐야 할 때와

가야 할 길을 알았다.

다음은 말의 잠언이다. 마음의 움직임은 말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므로 말을 할

때는 조급함과 망령됨을 막아야 마음이 고요하고 한결 같게 된다.

끝으로 맹동의 잠언이다. 명철한 사람은 조짐을 알기에 생각을 정성스럽게 하고,

뜻이 있는 사람은 실행하는 데 힘써 자신의 뜻을 지켜낸다.

바른 이치에 순종하면 여유가 있고 욕심을 따르면 위험에 빠지게 된다.<정자程子>

 

 

공자는 수제자였던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극기복례克己復禮, 스스로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감을 말해준다. 안연이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다시 묻자 대답했던

말이 ‘네 가지 해서는 안 될 일(사물四勿)’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인은 공자가 평생을 두고 추구했던 도의

핵심이다. 하지만 공자는 ‘인이 무엇이다’라고 확실한 정의를 내려주지는 않았다.

따라서 많은 제자들이 인을 알기 위해 공자에게 물었고, 공자는 제자의 학문과

수양의 수준에 맞춰 알기 쉽게 인을 설명해줬다. 그 가운데 수제자로 학문과

수양의 수준이 가장 높았던 안회에게 가르쳐준 인이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자는 ‘네 가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풀어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나 안회와 같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거쳐온 수양의 길을 보통사람

들이 따르기는 힘들다. 그 핵심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당연히 따르기도 힘든

법이다. 그래서 정자는 그 ‘네 가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잠언으로 풀어서

알려주고 있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자경문自警文)’로도 삼고자 했다.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성장한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나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라는 ‘효학반斅學半’의 성어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글을 지음으로써 스스로도 수양과

학문의 경계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정자는 성리학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국 송시대의 대표적인

학자다. 형인 정명도程明道와 함께 이정二程으로 불리며, 성리학의 원류로 꼽힌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알려진 주자가 자신의 학설을 정립 할 때 크게 도움을

받았다. 정자의 학문은 유교와 <역경>을 폭넓게 어우르지만 우리에게는 삶의

통찰을 보여주는 ‘인생삼불행 人生三不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년등과少年登科, 어린 나이에 출세하는 것. 석부형제지세席父兄弟之勢, 권세있는

부모형제를 만나는 것. 유고재능문장有高才能文章, 재능과 문장이 뛰어난 것.

오늘날 가장 큰 행운이라고 하는 세 가지가 긴 인생에서 보면 오히려 불행이

된다는 것이다. 젊어서 일찌감치 출세 길에 올라 명성을 날리던 뛰어난 사람들

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추락하는 요즘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늘로부터 받은 재능이나 운보다는 차곡차곡 내실과 실력과 경험을 쌓아서

이룩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되고, 이러한 경륜이 있어야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다는 소중한 통찰이다.

 

외부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것

 

정자의 사잠四箴은 공자가 말했던 바와 같이 먼저 보는 것(시잠視箴)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눈을 감고 살지 않는 한 눈에 보이는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것이 있다. 또한 이미 본 것을

되 물릴 수도 없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것은 선하지 않는 것, 깨끗하지

않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서

마음이 달라진다. 그 반대로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보는 것이 달라지기도 한다.

마음이 맑고 깨끗한 상태면 아름답고 좋은 것을 찾아서 보게 되고, 마음이

정욕과 욕망에 미혹되어 있다면 욕망을 충족하는 것을 찾아서 보게 된다.

정자는 이처럼 보는 것에 의해 마음이 가리어지는 것을 경계했다. 마음은 원래

텅 비어 있어서 설사 사물에 의해 영향을 받고 가려져도 그 자취가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마음이 가리어지면 속마음이 옳지 못한 곳으로 가게 되므로 바깥,

즉 보는 것을 제어함으로써 그 마음을 안정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극기복례의 공부이고, 이 공부를 계속하게 되면 ‘마음이 진실해진다

(성)’고 정자는 말한다.

시잠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이라면 듣는 것을 제어하는 청잠聽箴은 올바른

천성을 지키는 것이다. 듣는 것은 보는 것보다 더 어렵다. 처음 들을 때는

그 말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말이 교언영색인지,

진실한 말인지는 잘 듣고 심사숙고하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많은 현자들은 진실한 말을 가려 듣기를 가르쳤다. 공자가 말했던

“교언영색을 하는 사람은 인한 사람이 없다”나 <명심보감>에 실려 있는 “나에게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도둑이요,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스승이다”와 같은

말들은 당장 귀에 달콤한 말을 좇는 성향을 경계하는 말이다.

 

말과 행동은 모든 일의 중심이다

 

시잠과 청잠은 외부의 일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외부의 일이나 물질 등 유혹하고 어지럽히는 것들로부터 마음과 천성을 지키는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바깥을 제어해 안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언잠言箴과 동잠은 나의 속으로부터 나오는 언행을 제어해 예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말은 마음에 있는 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음이

격해지면 말도 격해지고, 마음이 평온하면 말도 평온해진다. 하지만 정자는

역으로 말하는 것을 제어해야 마음도 평안해진다고 했다. 속마음과 겉으로 하는

말이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대화를 주고 받다가

자신도 모르게 점차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급하거나 망령되어 함부로 말하는 것만 경계해도 마음도 고요하고 한결

같아질 수 있다고 보았다.

정자는 말이란 추기樞機, 곧 모든 일의 중추이므로 반드시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추기는 <주역>에 실려 있는 “말과 행동은 군자의 추기다(언행 군자지추

言行 君子之樞機).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방법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

는가?” 에서 비롯되었다. 말은 싸움을 일으키기도 하고 우호를 낳기도 하며,

길흉과 영욕을 모두 불러온다. 지나치면 소홀히 하면 엉성해지고, 지나치게 번잡

하면 지루하게 된다. 또한 자기가 함부로 하면 남으로부터 오는 말도 함부로

오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논어>를 비롯해 많은 고전에서는 말의 신중함과

진실함을 가르치는 경구들이 수없이 많이 실려 있다.

 

“사달이이의(辭達而已矣) 말은 뜻을 전달하면 그만이다 (<논어>).”

“선행기언이후종지(先行其言而後從之), 먼저 실천하고 그 다음에 말하라 (<논어>).”

“다언삭궁불여수중(多言數窮不如守中) 말이 많으면 빨리 궁해지니 차라리 속을

비워 지키느니만 못하다 (<도덕경>)>”

“언유소화야(言有召禍也), 말이 많으면 반드시 화를 불러온다 (<순자>).”

군자약언소인선언(子約言小人先言) 군자는 말을 아끼지만 소인은 말을 앞세운다

(<예기>).”

 

이처럼 말이 곧 그 사람이고, 말을 통해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으므로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많은 경전들은 말해준다. 그래서 정자는 언잠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법도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 말지니, 가르침의 말을 명심하고 공경하라!”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오래 되면 본성이 된다

 

마지막으로 동잠은 생각(사)과 뜻(지)을 통해 행동을 제어할 것을 권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함으로써 행동의 진실함을 구한다.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바르게, 진실하게 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

행동도 바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뜻이 있는 사람(지사志士)은 행동을 할 때

자신의 뜻을 지켜나간다. 뜻 있는 사람이 자신의 뜻을 지켜나가는 것은 바로

의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런 행동들이 습관이 되도록 몸에 익히고, 몸에 익어

본성처럼 된다면 (습여성성習如性成) 성현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정자는 말하고

있다.

습여성성은 <서경>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원전에서는 ‘나쁜 습관이 본성이 된다’

는 좋지 않은 의므로 쓰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올바른 도리와 이치를 따르는

것이 본성으로 자리잡도록 연마한다는 뜻이다. ‘인의仁義’라는 올바른 도리를

습관이 되도록 연마해 애초에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것과 같은 천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성인이나 현인과 같이 되는 일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옛 선비들도 버거워했던 가르침을 우리가 온전히 따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보통사람으로서 성현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수양하고 절제했던

삶을 지킨다고 생각하면 우선 까마득해진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

지도, 행하지도 말라니, 그렇게 살라고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란 자신이 본 것, 들은 것으로 이뤄진 존재다. 본 것, 들은 것은

우리가 공부와 경험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들을 말한다.

이처럼 보고 들은 것들이 마음을 이루고 생각과 가치관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과 생각과 가치관이 우리의 말이 되고 행동이 된다. 이런 말과 행동

들이 점차 쌓여서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천성이 된다. 하지만 습여성성의

고사에서 보듯이 바르지 못한 일을 쌓아나가면 나쁜 습관이 되고, 나쁜 습관은

나쁜 본성이 되고 만다.

옛 성현들을 따르기는 버겁다. 그러나 선한 습관을 쌓아나가는 일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절제다.

우리가 굳이 찾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수많은 유혹이 보고 들리는

시대다. 보고 들리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것에 마음을 둘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

바르고 선한 것을 취하면 바르고 선한 것이 우리를 만들어가고, 그 속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바르고 선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쌓아서 습관으로

만들면 곧 천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고 마주하는 무수한 것들에 물들고,

반대로 주변의 존재들에게 스스로를 물들이기도 하는 존재다.

우리는 물들고 물들이는 색을 선택할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