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르는 것이다
孟子曰 養心莫善於寡欲 其爲人也寡欲
雖有不存焉者 寡矣 其爲人也多欲 雖有存焉者 寡矣
맹자왈 양심막선어과욕 기위인야과욕
수유불존언자 과의 기위인야다욕 수유존언자 과의
맹자가 말했다. 마음을 수양함에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
사람됨이 욕심이 적다면 설사 그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더라도 잃는 정도가 적다
그 사람됨이 욕심이 많다면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더라도 보존됨이 적다.
<맹자><진심장구 하 盡心章句 下>
<맹자>에는 마음이 관한 많은 글들이 실려 있다. ‘잃어버린 마음을 구하라’고
했고, 그 ‘마음을 보존하라’고도 했다. ‘잃어버린 마음을 구하라(구방심求放心)’는
앞의 인용문에서도 소개되었던 글이다. 인仁이 곧 사람의 마음이며, 공부는 잃어
버린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을 보존하라(존기심存其心)’는 <진심 상>의 맨 앞에 실려 있는 글이다.
“자신의 선한 마음을 다 드러내는 자는 자신의 선한 본성을 안다. 자신의 선한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아는 것이다. 선한 마음을 보존하고 선한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일이다(존기심 양기성 소이사천야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이 구절들에서 사람의 마음은 사람의 선한 본성(사단四端)을 말한다.
맹자는 사람의 선한 본성을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늘의 뜻에 맞는 삶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에는 사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칠정七情이라고 해서<예기禮記
예운禮運>에 나오는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도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는 칠정 중에서 욕欲, 즉 욕망을 절제할 수 있어야 사람의 선한
본성을 잘 보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욕망이
없을 수 없고 절제하기도 어렵다.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성인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다. 주자는 이렇게 말했다. “욕망이란 입, 코, 귀, 눈과 사지가 원하는 바를
말한다. 이것이 사람에게 없을 수는 없지만 조절하지 않으면 그 본래의 선한
마음을 잃지 않을 자가 없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맹자는 <진심 하>에서 이에 관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입이 좋은 맛을 구하고, 눈이 아름다운 미색을 구하고, 귀가 아름다운 소리를
구하고, 코가 향기를 구하고, 몸이 편안함을 구하고 좋아하는 것은 본성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명이 있기 때문에 군자는 본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군자불위성야 君子不謂性也).”
이목구비와 사지는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고, 사람들은 누구나 욕구가 있다.
바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의 다섯 가지 욕망(오욕五欲)으로, 사람들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명命이 있다. 명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운명으로, 사람이 주관적으로 결정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삶의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설사 욕구를 즐길 여건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본능을
무한하게 추구해서는 안 되는 도덕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보면
맹자의 본성론本性論은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선한 본성을 추구할지, 아니면 욕구를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맹자는 ‘구하면 얻을 수 있고, 얻으면 유익한 것은 선한 본성’이고, ‘욕구는
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얻을 수도 없고 설사 얻었다고 해도 무익할 뿐’이라고
알려준다.
“구하면 얻게 되고 버리면 잃게 되니 구해서 얻음에 유익한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을 구함이다. 구하는 데는 도가 있고, 얻든 것은 운명에 달려 있다. 따라서
구해서 얻음에 무익한 것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진심 상>).”
여기서 내 안에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선한 본성이고, 내 밖에 있는 것은
외부의 일이나 사물에 의해 자극을 받아 생겨난 욕구다. 내 안의 선한 본성은
원래 내게 있던 것이므로 구하는 대로 얻을 수 있고, 그 얻음은 유익하다.
하지만 나의 밖에 있는 것을 구하는 욕심은 구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설사 얻는다고 해도 무익할 뿐이다.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다산 정약용은 <심경밀험>에서 욕망을 없앨 수는 없으나 이록利祿(재물과 벼슬)을
좇는 탐욕만은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영체靈體(마음) 안에는 본래 욕구의 단서가 있다. 만약 이 욕심이 없다면
세상만사에 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익에 밝은 자는 욕심이
이록을 좇아가며, 의리에 밝은 사람은 욕심이 도의를 추구해간다. 욕구가 극에
달하면 두 가지 모두 설사 몸이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좇다 죽고 열사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는다.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마음이 담백하고 욕심이 없어서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악을 행할
수도 없었으며 문장을 지을 수도 없었고 생산 활동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 하나 버려진 물건과 다름 없을 것이니, 사람이 어찌
욕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맹자가 가르친 것은 대개 이록의 욕망일 뿐이다.”
다산은 사람이 욕망을 가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
다고 강조했다. 만약 사람이 욕망이나 욕심이 없으면 마치 생명이 없는 허수아
비처럼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산이 말했던 사람은 오늘날의 관점
에서 보면 정신적으로 아픔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만 다산은 무조건
욕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물과 벼슬과 같은 이익을 좇는 욕망을 다스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논어>에 실려 있는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군자유의 소인유어리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를 예로 들고 있다.
군자는 의로움의 욕구를, 소인은 이익의 욕구를 좇는 것이다.
심지어 의로움을 좇든 이익을 좇든 이 두 가지 모두 다 극에 달하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의로움을 좇는 사람은 인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삶을 사는
것이고, 탐욕을 좇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명심보감>에 실려 있듯이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
(인위재사 조위식망 人爲財死 鳥爲食亡).”
이익에만 민감한 조직은 결코 발전할 수 없다
<맹자>의 맨 첫머리를 보면 양혜왕梁惠王과 맹자의 대화가 나온다. 양혜왕이
맹자를 보고 “어르신께서 먼 데서 오셨으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만한 것이
있겠지요? 라고 묻자, 맹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에 대해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만이 있을 뿐입니다.” 왕의 의례적인 질문에 대해
대단히 파격적이고 무례하기까지 한 대답이다. 맹자는 이어서 자신이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를 설명한다. 왕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은 물론 나라
전체가 망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왕께서 ‘어떻게 해야 내 나라가 이로울 것인가’하면, 그 밑의 대부大夫는 ‘어떻게
해야 내 집안에 이로울 것인가?’ 라고 하고, 선비나 평민들은 ‘어떻게 해야
나에게 이로울 것인가?’ 하고 말하게 됩니다. 위와 아랫사람이 제각기 서로
이익을 취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만 대의 전차를 소유한 나라
에서 왕을 시해할 자는 그 밑에서 천 대의 전차를 소유한 집안일 것이고, 천
대의 전차를 소유한 나라에서 왕을 시해할 자는 그 밑에서 백 대의 전차를
소유한 집안일 것입니다. 만약 의를 뒤로 하고 이익을 앞세운다면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개인주의가 지극한 이기주의로 변질되는 현실에서 되새겨봐야 할 경구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것을 빼앗고, 권력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을 때에는 힘과
권력을 동원한다. 윗사람들이 욕심을 챙기는 데에만 몰두 할 때 아랫사람들
또한 그것을 그대로 배워 부정과 부패로 자기 이익을 챙기기 바쁘게 된다. 결국
사회의 모든 계층이 자기 이익만 챙기게 되고 결국 이런 극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조직이나 나라는 망하고 만다. 물론 오늘날에는 맹자의 주장과 같은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기반
으로 하는 극단의 경제학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미래학자들의
경고 또한 새삼스럽지 않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2,300년 전 맹자는 그 해법을 제시했다. 바로 저마다 욕심을 줄이고 선한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채근담>에는 “하늘은 한 사람을 부유케
하여 사람들의 가난을 구제케 했으나, 세상은 제 부유함에 취해 가난한 사람을
능멸한다”고 실려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천벌을 받는다”라고 결론 내렸다.
삶에서 목적이란 완성을 실현하려는 의지이며
목표는 목적을 위해 거치는 과정이다.
목적과 목표를 혼동한다면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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