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
자왈: "위정이덕, 비여북신, 거기소, 이중성공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정사를 하되 덕으로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뭇 별들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과 같다."
* ‘정(政)’이란 바로 잡다의 뜻이니 사람(남)의 바르지 못함을 바로 잡는 것이요, 덕(德)이란 말은 얻는다’의 뜻이니, 도(道)를 행하여 마음에 얻는 것이 있는 것이다. 북진(北辰)은 북극성이니, 하늘의 중추(中樞)이다. 거기소(居其所)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공(共)은 향하는 것이니, 뭇 별들이 사면(四面)으로 둘러싸서 북극성을 향함을 말하는 것이다.
* 정사(政事)를 하되 덕(德)으로 하면 하는 일이 없어도 天下가 그에게 돌아가니, 그 형상이 이와 같은 것이다.”
* 정자(程子, 伊川)가 말씀하셨다. “정사(政事)를 하되 덕(德)으로 한 뒤에 무위(無爲)를 할 수 있는 것이다.
* 범씨(范氏, 范朝禹)가 말하였다. 정사(政事)를 하되 덕(德)으로 하면 동(動)하지 않아도 교화’되고 말하지 않아도 믿고, 하는 일이 없어도 이루어지니, 지키는 것이 지극히 간략하면서도 번거로움을 제어할 수 있고, 처(處)하는 것이 지극히 고요하면서도 움직이는 것을 제어할 수 있고, 힘쓰는 것이 지극히 적으면서도 여러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
(해설) 인(仁)을 핵심으로 하는 공자 사상의 궁극적인 지향은 두 가지로, 개인 수양의 측면에서 도덕군자요, 현실 정치의 측면에서 인정 덕치입니다. 이른바 '위정이덕(爲政以德')은 공자 정치사상의 핵심입니다. 형벌로 옥죄기보다는 덕성으로 감화시켜 만백성이 마음으로 따르게 함으로써 성세(盛世)를 이룩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위정자의 높은 덕성과 고결한 품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음 깊이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의 바탕 위에 백성들에게 두루 은혜를 베푸는 '혜민(惠民)'의 진정(眞情)이 이어질 수 있고, 또 만백성은 위정자의 그 같은 높은 덕성과 덕행에 절로 교화’되고 감화되어 심복(心服)함으로써 '무위이치(無爲而治')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최고통치자를 비롯한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에 대한 요구가 높은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공자는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을 한껏 숭앙했는데, 그들은 모두 각기 내심에 넘치는 도덕 수양에 감화된 천하 난민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따름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이룩한 성군들입니다. 공자가 <위령공>편에서 말했습니다. "일부러 어떻게 하지 않고도 천하가 절로 잘 다스려지게 한 사람은 아마도 순’임금이겠지? 순임금께서 어떻게 하셨더냐? 스스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단정하고 엄숙히 임금의 자리를 지켰을 따름’이로다."(15-5) 그야말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행동하지 않아도 절로 감화되고, 말하지 않아도 절로 믿으며 (爲政而德, 則不動而化, 不言而信") "일부러 뭔가를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절로 귀심(歸心)하니 (無爲而天下歸之"), 이를 일러 '무위이치'라 할 것입니다.
한편 예로부터 일각에서는 '위정이덕'이란 인에 근거해 만물을 화육하고, 의(義)에 근거해 만민을 바로잡으며, 중화(中和)의 도에 근거해 예악을 제정하는 등 이미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므로 결코 '무위'라 할 수 없으며, 단지 '무위'같은 '유위(有爲')일 따름이라고 하는 등 반론이 제기되어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인위(人爲')조차 철저하게 배척하는 도가의 '무위'와 달리, 유가의 '무위'는 일정 성분의 '인위'를 제한적으로 수용해 인정한다는 점을 간과한 견해일 뿐입니다.
<위정爲政> 2-2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자왈: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사무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경》300편에 한마디 말로 (전체를) 덮을(대표할) 수 있으니,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말이다."
* 시경(詩經)은 311편인데, ‘3백편’이라 말씀한 것은 큰 수를 든 것이다. 폐(蔽)는 개(蓋, 덮음)와 같다.
<시경>은 305편의 시와 가사 없이 제목만 전하는 6편의 시를 합쳐 총 311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思無邪)는 것은 <노송(魯頌) 동편(駧篇)>의 말이다. 무릇 시의 내용이 선(善)한 것은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동시켜 분발(奮發)하게 하고, 악(惡)한 것은 사람의 방탕한 마음을 징계(懲戒)할 수 있으니, 그 효용(效用)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성정(性情)을 얻는 데에 돌아가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이 은미(隱微)하고 완곡(婉曲)하며, 또 각각 한 가지 일을 따라 말하여서, 그 전체를 곧바로 가리킨 것을 찾는다면 이 말처럼 분명하고도 뜻을 다한 것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夫子께서 <시경>3백편에 오직 이 한 마디 말이 충분히 그 뜻을 다 덮을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보여주신 뜻이 또한 깊고 간절하다.
* 정자(程子, 伊川)가 말씀하셨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성(誠, 진실함)이다.”
* 범씨(范氏, 范祖禹)가 말하였다.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요점(要點)을 아는데 힘써야 하니, 요점을 알면 요약함을 지킬 수 있고, 요약함을 지키면 해박함’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시경 3백편과 곡례(曲禮) 3천가지도 한 마디 말로써 그 뜻을 다 덮을 수 있으니,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무불경, 毋不敬)’는 말이다.
(해설) 《시경》305편은 <풍風>, <아雅>, <송頌> 세 부분으로 나뉘며, <풍>에는 15국풍國風 160편, <아>에는 대아大雅, 소아小雅 105편, <송>에는 주송周頌, 노송魯頌, 상송商頌 40편이 각각 수록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여러 경전 가운데서도《시경》을 특히 중시했는데, 《시경》이 갖는 교화적 의의와 가치를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논어》를 엮은이들이 이 장을 <위정>편에 편입 배열한 까닭 또한 《시경》의 정치, 사회적 교화 기능을 중시해서’일 것입니다.
공자는 일찍이 "그 사람됨이 온유돈후함은 곧 《시경》의 교화 효과이다_是爲人也溫柔敦厚, 詩敎也"《예기》<경해經解>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또 《시경》의 종지(宗旨)를 '사무사(思無邪)'로 요약했습니다. 요컨대 《시경》의 시가 권선징악, 즉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가운데 사람의 성성을 도야하고 순화하는 교화적 효용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사무사', 즉 그 사상의 순정(純正), 무사(無邪)함 때문입니다. 《사기》<굴원열전屈原列傳>에서 "국풍은 호색적이나 음탕하지 않고, 소아는 원망, 비방하나 문란하지 않다(國風好色而不淫, 小雅怨誹而不亂)"라고 했는데, '음탕하지 않고' '문란하지 않음'이란 바로 '무사함'을 부연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 예술 작품의 사회적 효용과 영향이 막대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위정爲政> 2-3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자왈: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도하되 법(法)으로써 하고, 가지런히 하되 형벌(刑罰)로써 하면 백성들이 형벌은 면하되 부끄러워함이 없다.” 인도하되 덕으로써 하고 가지런히 하되 예로써 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선(善)에 이른다.”
* 도(道)는 인도(引導)와 같으니 솔선수범을 말한다. *정(政)은 법제(法制)와 금령(禁令)을 이른다. 제(齊)는 통일 시키는 것이니, 인도해도 따르지 않는 자를 형벌을 가하여 통일 시키는 것이다. 면이무치(免而無恥)는 구차히 형벌은 면하나 부끄러워하는 바가 없음을 말하니, 비록 감히 악한 짓을 하지는 못하나 악한 짓을 하려는 마음이 일찍이 없지는 못한 것이다.
* 예(禮)는 제도(制度)와 품절(品節)을 말한다. 격(格)은 이름(至)다. 몸소 행하여 솔선수범하면 백성들이 진실로 보고 감동하여 흥기하는 바가 있을 것이요, 그 얕고 깊고 두텁고 얇아 균일하지 않은 것을 또 예(禮)로써 통일 시킨다면 백성들이 선(善)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또 선(善)함에 이를 수 있음을 말씀한 것이다. 일설(一說)에 격(格)은 바로 잡음이니, <서경><주서>(경명, 冏命)에 ‘그른(나쁜)마음을 바로잡는다’고 하였다.
* 내가 생각하건대(愚謂) 정(政, 法制)은 정치를 하는 도구이고 형벌(刑罰)은 정치를 돕는 법이며, 덕(德)과 예(禮)는 정치를 내는 근본이고, 덕(德)은 또 예(禮)의 근본이다. 이것은 서로 종(終)과 시(始)가 되어 비록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으니, 법제와 형벌은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게 할 뿐이요, 덕과 예의 효과는 백성들로 하여금 날로 개과천선(改過遷善)하면서 스스로 알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한갓 지엽적인 법제와 형벌’만을 믿어서는 안 되고, 또 마땅히 그 근본인 덕과 예를 깊이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해설) 이 장은 2-1장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공자의 정치 이상은 덕정과 예치(禮治)가 핵심입니다. 《예기》<치의緇衣>편에서 말했습니다. "대체로 덕으로 교화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이 향선(向善)의 마음을 가지나, 정령으로 교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도피(逃避)의 마음을 갖는다. (夫民敎之以德, 齊之以禮, 則民有格心; 敎之以政, 齊之以刑, 則民有遯心.") 이는 곧 이장을 인용, 부연한 것으로, 그 종지宗旨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유가의 덕치와 법가(法家)의 법치, 양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 법령이 외부적인 강제 수단이라면, 도덕은 내재적인 자제(自制)의 역량입니다. 법치가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킨다면, 덕치는 덕으로 사람을 감화시킵니다. 따라서 전자는 치표(治表), 즉 겉만 다스리는 데에 그칠 뿐이나, 후자는 치본(治本), 즉 근본을 다스립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치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치나 덕치, 어느 한 가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최상의 대안은 바로 도덕과 예교(禮敎)에 의한 교화를 위주로 하면서 법제와 금령으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주자가 이른 대로, "정령이 통치의 직접적인 도구이고, 형벌이 통치를 돕는 법제라면, 도덕과 예교는 곧 통치 행위의 근본이며, 도덕은 또 예교의 근본이다. 이들 양자는 서로 끝이 되고 시작이 되어 비록 어느 한쪽도 폐할 수는 없지만, 정령과 형벌은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도덕과 예교의 효과는 오히려 능히 백성들로 하여금 날로 개과천선하면서도 스스로는 알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한갓 말단’적인 정령과 형벌’만을 믿어서는 안 되며, 근본적인 도덕과 예교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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