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자장(子張)-공자의 삶의 자세

by TheEasyLife 2023. 5. 9.

자장 19‧01

<자장(子張)편에는 모두 공자의 제자들이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 공자에게 들은 말로 제자들 나름대로 발전 시켰다. 공자가 도대체 누구로부터 배웠느냐는 위나라 공손조(公孫朝)의 물음에 자공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의 스승이었다고 답한다. 누구에게든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고치는 배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공자의 삶의 자세를 정확히 짚어낸 말이다. >

자장 1901

子張曰: "士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

자장왈: "사견위치명, 견득사의, 제사경, 상사애, 기가이의."

자장이 말하였다. "선비가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이익을 보고 의(, 올바름)를 생각하며, 제사에 공경함()을 생각하고, 상례에서는 슬픔을 생각한다면 괜찮다.”

(
注釋) 치致는 다하다, 바치다는 뜻이다. ()와 의미가 같다. 기其는 앞의 네 가지를 가리킨다. 가이의可已矣는 선비로서 다하였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蛇足) 여기에는 세 가지 '사思'가 나오는데, 함의는 똑같지 않습니다. '얻는 일'은 이로움을 얻는 일인데, 이로움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이로움을 얻게 되는 과정이 문제가 됩니다. 나 스스로 한 일에서 마땅하게 얻어지는 것이냐, 마땅함을 넘어서 요행으로 얻게 되는 것이냐, 사사로움으로 얻는 것이냐, 그릇된 판단이나 도리에 어긋난 일이 내재하느냐 따위를 판단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올바름을 생각하는 일'에서 생각은 곧 정황이나 상황에 대한 판단을 뜻합니다. 그러나 제사와 상례에서 하는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제사와 상례는 접하는 대로 지극함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지극함은 한결 같은 것이니, 평소에 지녔던 마음가짐과 몸가짐에서 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절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굳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장은 "지극히 삼가함을 생각하고, 슬픔을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는 제사와 상례가 특정한 사건이기 때문에 각별한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속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장이 말한 대로라면, 이 생각은 일종의 머뭇거리는 것이고, 그 머뭇거리는 것은 일상에서 배지 않은 마음가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사나 상례에서 지극히 삼가는 마음, 참된 슬픔이 저절로 솟아나려면 일상에서 늘 지극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비의 공부이고 수행이며 학문입니다. 자장의 말은 공자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깨치지 못한 데서 나왔습니다. <팔일> 3-12에서 공자가 한 말(祭如在, 祭神如神在. 子曰: "吾不與祭, 如不祭.")과 견주어 보면,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서 목숨을 바치는 일, 이로움을 얻는 일에서 올바름을 생각하는 일"이 자장의 실천적 삶에서 나온 말인지 의문이 듭니다.
앞서 여러 차례 자장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그의 공부는 경험을 통한 깊은 이해보다 관념적인 이해에서 그쳤습니다. 그래서 그를 두고 <선진> 11-18에서 '치우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은 나름대로 생각을 거듭했기 때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생각은 충분히 체득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생각은 적을수록, 이왕이면 없을수록 좋습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올바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공부가 거듭되면 생각하지 않고도 바로 올바름을 알고 올바르게 합니다.


자장 1902

子張曰: "執德不弘, 信道不篤, 焉能爲有? 焉能爲亡?"

자장왈: "집덕불홍, 신도불독, 언능위유? 언능위망?"

자장이 말하였다. "덕을 잡음(지킴)이 넓지 못하고, ()를 믿음이 독실하지 않다면, 어찌 있다고 말하며, 어찌 없다고 말하겠는가?"

(
注釋) 집執은 잡다, 지키다는 뜻이다. 홍弘은 강强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그대로 풀었다. 언능위유, 언능위망焉能爲有? 焉能爲亡? 에 대해서는 대체로 "경중을 따질 것이 있다 없다" 또는 "경중이 있다 없다" 등으로 푸는 경우가 흔한데, 여기서는 문맥을 고려하여 소박하게 풀었다. 유有와 망亡은 앞의 덕과 도가 있다, 없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알맞다.

(
注釋) 덕을 잡거나 지키는 일은 아직 덕을 오롯하게 체득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남에게까지 넓히는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도를 믿는 것은 도를 알고 행하는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도탑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덕을 잡는 것은 시작일 뿐이고, 도를 믿는 것 또한 시작일 뿐입니다. 거기에서 선비의 공부는 시작됩니다. 오롯하게 체득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사사로움이나 이로움 따위로 말미암아 흔들리거나 옆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의 과정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덕을 갖추었는지, 도를 행하는지" 따위에 대해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굳이 판단한다면, "덕을 잡고서 넓히지 못하고, 도를 믿으면서 도탑지 않은 자"는 이제 공부를 시작한 자요 공부가 설익은 자입니다. 선비는 시작한 것, 설익은 것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지는 데 힘씁니다. 완전해지지 않으면, 결코 배움이나 공부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뿐 입니다. 그런데 자장은 "어찌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애매한 말을 하였습니다. 애매하다는 것은 명쾌하게 말할만한 깨침이 없이 한 말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듣는 이도 분명한 뜻을 알기가 어렵고 또 알아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수준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덕을 잡고서 넓히지 못하고 도를 믿으면서 도탑지 않은 자는 아직 덕이나 도를 운운할 수 없다"고 왜 말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자장 자신이 그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자장 1903

子夏之門人問交於子張. 子張曰 "子夏云何 對曰: "子夏曰, '可者與之, 其不可者拒之.
子張曰: "異乎吾所聞. 君子尊賢而容衆, 嘉善而矜不能. 我之大賢與, 於人何所不容? 我之不賢與, 人將拒我, 如之何其拒人也?"

자하지문인문교어자장. 자장왈: "자하운하 대왈 자하왈, '가자여지, 기부가자거지.'"
자장왈: "이호오소문. 군자존현이용중, 가선이긍부능. 아지대현여, 어인하소부용? 아지부현여, 인장거아, 여지하기거인야?"

자하(子夏)의 문인이 자장(子張)에게 사귐에 대해 물었다. 자장이 말하였다. "자하는 무엇이라 하던가?"
"
자하께서는, ' 可한 사람과 사귀고 可하지 않은 사람은 사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구나. 군자는 어진이를 존경하고, 뭇사람(대중)을 포용하며, 잘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여기고, ()하지 못한 이를 가엾이 여긴다. 내가 크게 어질다면, 남들에 대해 누구인들 용납하지 못할 것이며, 내가 어질지 못하다면 남들이 장차 나를 거절할 것이니, (내가) 어떻게 남들을 거절 할 수 있겠는가?"

(
注釋) 가可는 썩 좋은 것이 아니고 그 정도면 좋다는 뜻이다. 거拒는 막다, 멀리하다는 뜻이다. 현賢은 똑똑하다, 야무지다는 뜻이다. 가嘉는 아름답게 여기다, 기리다는 뜻이다. 긍矜은 가엾이 여기다는 뜻이다.

(
蛇足) 자하子夏와 자장子張의 말은 둘 다 옹색합니다. "괜찮은 사람과 함께하고, 괜찮지 않은 사람은 멀리하라"는 것은 자신의 공부가 깊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남을 의식하는 데에 마음이 가 있음을 드러낸 말입니다. 괜찮은 사람이냐 괜찮지 않은 사람이냐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얕은 생각과 공부의 얄팍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하에 대해서는 <학이> 1-7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장도 이를 알아차렸는지, "군자는 똑똑한 사람을 높이고 뭇사람을 껴안으며, 착함을 기리고 잘하지 못하는 것을 가엾이 여긴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들은 것' 입니다. 스승인 공자로부터 들은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로도 충분한데, 어찌 뒷말을 덧붙였는가? 특히 "내가 똑똑하지 않다면 남들이 나를 멀리 할 것이니"라는 말에서는 세속적인 처세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자장이 말한 '남들'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인가? 내가 군자의 길을 가더라도 남들이 나를 멀리할 수 있습니다. 도가 행해지지 않던 시대가 아니던가? 군자보다 소인이 행세하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자장은 왜 이런 말을 했는가? 자장은 적극적으로 벼슬을 구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점에서 자하와 자장은 오십보백보입니다.


자장 1904

子夏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也."

자하왈: "수소도, 필유가관자언, 치원공니. 시이군자부위야."

자하가 말하였다. "비록 작은 도(技藝)라도 반드시 살펴볼 만한 것이 있으나, 원대함(遠大, 멀리 크게 나아가다)에 이르는데 장애가 될까 두렵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하지 않는 것이다."

(
注釋) 소도小道는 하찮은 재주나 기예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작은 도'로 보아야 한다. 치致는 이르다, 이루다는 뜻이다. 니泥는 진창에 빠진 발처럼 움직이기 어려운 것이니, 막히다는 뜻이다.

(
蛇足) 소도(小道)라니! 도에 크고 작은 것이 있는가? 자하가 이 말을 "하찮은 재주나 기예"로 썼다면, 하필이면 '소도'라고 하였는가? '예藝'라는 말을 쓰지 않았는가? 소도라는 말에 이미 자하의 사유나 그의 수준이 드러나 있습니다. "멀리 나아가려 하면 막히게 된다"고 한 말에서는 당시에 사람들이 ", !" 하면서도 참된 도가 아닌 기예나 재주 따위를 도라고 하고, 그런 도로써 원대한 일을 꾀하려 했던 풍조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은 도가 아니다"고 명확하게 말했어야 합니다. 도가 아니므로 군자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멀리 나아가려 할 때 막히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하는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세태에 영합하지 않았으나, 소극적으로는 그릇된 세태를 용납한 셈이므로 곡학아세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왜 다른 학파에서 그토록 유가를 비판했는지는 자장이나 자하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들의 사유나 삶이 이러했으니, 그들을 이은 자들은 또 어떠했겠는가? "적은 밖에 있지 않다. 안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여기서도 입증되었습니다.


자장 1905

子夏曰: "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

자하왈: "일지기소망, 월무망기소능, 가위호학야이의

자하가 말하였다. "날마다 모르던 것을 알고, 달마다 잘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
注釋) 망亡은 부지不知를 뜻한다. 능能은 잘하다는 뜻이다.

(
蛇足) 앞 장에서 말한 대로 자하의 말은 옹색합니다. 핵심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곧 배움입니다. 익히면 저절로 잘하게 되고, 잘하면 잊지 않으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배우고 익히는 것, 그것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好學者는 日新而不失이니라. (배움을 좋아하는 자는 날로 새롭고 잃지 않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