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學而> 1-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자왈: "군자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일에 민첩하고, 말에 삼가며, 도가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옳고 그름을) 질정’한다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이를 만하다."
* 편안함과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 다는 것은 뜻이 다른데(道에) 있어서 미칠 겨를이 없는 것이다.
* 일에 민첩하다(敏於事)는 것은 부족(不足)한 것(덕행, 德行)을 힘쓰는 것이요, 말에 삼간다(愼於言)는 것은 유여(有餘)한 것(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고, 반드시 道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옳고 그름을 질정(質正)한다면 배움을 좋아하고 이를 만하다. 무릇 도(道)라고 말한 것은 모두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니, 사람이 누구나 함께 행하여야 할 것(道理)을 말한다.
* 윤씨(尹氏, 尹焞)가 말하였다. “君子의 배움이 이 네 가지에 능하다면 뜻이 독실하고 행실을 힘쓰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道가 있는 자에게 질정을 취하지 않는다면 어그러짐이 있음을 면치 못한다. 예컨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仁과 義를 배우다가 잘못된 자이나 그 흐름의 폐단이 無夫와 無君에 이르렀으니, 배움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이 可 하겠는가?”
(해설1) 공자는 일찍이 "나는 결코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며, 단지 옛 것을 좋아하여 급급히 탐구해 터득한 사람일 뿐이다_(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7-20)라고 하며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16-9)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10호戶 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신실’함이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5-28)라고 하며, 군자로서 겸허’함도 잊은 채 호학’함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피력했습니다. 따라서 학인(學人)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은 자연히 '호학'을 강조하고 권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공자가 말하는 호학은 품행과 지식을 아울러 이르면서도 전자에 치중합니다. "안회’라는 친구가 배우기를 좋아하여 노여움을 제삼자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有顔回者, 好學, 不遷怒, 不貳過."(6-2)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제자 가운데 누가 가장 배우기를 좋아’하는가를 물었을 때 답한 말입니다. 공자가 극찬한 안회의 호학이 품행 방면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설2) 여기서 공자는 호학하는 이상적인 형상을 세 가지 측면으로 제시합니다. 먼저 오로지 향학(向學)에 뜻을 두고 물질적 향유(享有)보다는 정신적 가치와 이상의 추구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 표본은 역시 '한 대그릇의 밥을 먹고 한 바가지의 물을 마시며 누추한 거처에서 살면서도 안빈낙도의 즐거움을 다른 걸로 바꾸지 않는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6-9) 안회의 호학 정신입니다. 진정 배부름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마음도 겨를도 없이 오직 안빈낙도할 뿐입니다. 또한 군자는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우고, 인성의 함양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행(知行)의 합일(合一)이 이상입니다. 이상에 이르는 길은 지난(至難)한 여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인 군자는 또한 나보다 나은 도덕군자에게 나아가 배우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바로잡아가야 합니다.
이상은 그야말로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이는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결국은 이 길을 가고, 이런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학이學而> 1-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자공왈: "시운: '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저왕이지래자!"
자공이 말하였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그것도 괜찮으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만은 못하다."
자공이 말하였다. "시경에 '절단해 놓고 다시 그것을 간 듯하며, 쪼아 다시 곱게 연마한 듯하다’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을 말’함일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야, 이제 비로서 함께 시를 말할 만 하구나. 지나간 것’을 말’해주자 올 것을 아는구나!"
* 첨(諂)은 비굴(卑屈, 낮추고 굽힘)한 것이요, 교(驕)는 긍사(矜肆, 자랑하고 멋대로 함)한 것이다.
* 상인(常人, 보통사람은 貧, 富의 한 가운데 빠져서 스스로 지킬 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두가지의 병통이 있는 것이다.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다면 스스로 지킬 줄을 안 것이나, 빈, 부의 밖으로 초월하지는 못한 것이다. 무릇 가(可)라고 말한 것은 겨우 가해서 미진한 바가 있는 말이다. 즐거워한다면 마음이 넓고 몸이 퍼져서 그 가난함을 잊을 것이요, 얘(禮)를 좋아한다면 선(善)에 처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이치를 따르기를 즐거워해서 또한 스스로 부유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공은 재화를 증식하였으니, 먼저는 가난하고 뒤에는 부유해서 일찍이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데에 힘을 쓴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질문한 것인데 夫子께서 대답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셨으니, 이는 이미 그의 능한 것을 허여(許與, 인정)하고 이르지 못한 것을 힘쓰게 하신 것이다.
* 시(時)는 <시경, 위풍, 기욱(詩經, 衛風, 淇욱)편이다. 절차탁마(切磋琢磨), 뼈와 뿔을 다루는 자는 절단하고서 다시 그것을 갈고, 옥과 보석을 다루는 자는 쪼아 놓고서 다시 그것을 연마하니, 다스림이 이미 정(精, 정교)한데 더욱 정(精)함을 구함을 말한 것이다. 자공은 스스로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음을 지극하다고 여겼는데, 夫子의 말씀을 듣고는 또 의리(義理)가 무궁’하여 비록 얻음이 있더라도 대번에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 됨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인용하여 밝힌 것이다.
* 왕(往)은 이미 말해 준 것이요, 래(來)는 아직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 내가 살펴 보건대, 이 장의 문답(問答)은 그 얕고 깊음과 높고 낮음이 진실로 변설(辨說)을 기다리지 않고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절단하지 않으면 가는 것을 베풀 곳이 없고, 쪼아’놓지 않으면 곱게 연마하는 것을 베풀 곳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비록 작은 성취에 안주하여 道에 나아가는 극치(極致)를 구하지 않아서도 안 되지만, 또한 허원(虛遠)한 데로 달려가서 자기 몸에 간절한 실제 병통을 살피지 않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해설) 공자가 시종 강조한 '호학' 정신의 본질은 배움이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결코 안주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끊임없이 정진함’입니다. 사람이 가난하면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아첨하기 쉽고, 부유하면 넉넉함’만 믿고 스스로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 때문에 자공이 말한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는" 것은 분명 훌륭한 인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자신을 곧고 바르게 지키고 있기는 하나, 가난함과 부유함을 완전히 망각하거나 초월한 경지는 아닙니다. 반면 공자가 말한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지만 예를 좋아하는 것"은 이미 가난함과 부유함을 초월한, 가일층 고상하고 고귀한 경지입니다. 배우는 사람에게 부단한 정진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한편, 이 같은 공자의 설명에, 자공은 즉각 《시경》에서 읊은 '절차탁마'의 의미와 연관시켜 학문 도덕상 '정익구정(精益求精)', 즉 이미 정교한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끊임없이 더욱 정교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함의를 깨닫습니다. 그러자 평소 제자들에게 '학(學)', '사(思)' 병행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권면해 온 공자는, 자공의 '거일반삼(擧一反三)', 즉 하나를 말하면 둘 셋을 미루어 앎에 찬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학이學而> 1-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 윤씨(尹氏, 尹焞)가 말하였다. “군자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구한다. 그러므로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면 그의 옳고 그름과 간사하고 정직함을 혹 분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해설) 사람은 스스로 내실을 다지고, 다른 사람은 됨됨이를 알아보는 혜안(慧眼)을 기를 뿐, 헛된 명성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공자가 여기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군자를 목표로 정진하라고 강조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신의 재학(才學)과 도덕 수준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사람은 본디 허명(虛名)을 좇을 소지가 다분한 것입니다. 하지만 배움은 근본적으로 자기 발전을 위한 것이며, 남이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 해도 내가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누차 같은 뜻의 말을 반복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사람들이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4-14)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스스로 훌륭한 자질을 갖추지 못함을 걱정하여라."(14-31) "군자는 스스로 참된 재능이 없음을 근심할 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은 근심하지 않는다."(15-19) 한마디로 "군자는 일의 탓이나 해법을 자기에게서 찾아야"(15-21)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은 그야말로 필수 불가결합니다. 사람이 만약 어리석은 식견과 안목으로 옥석을 가리지 못한다면, 현인을 만나서는 친애하고 존경하며 가르침을 청하지도 못할 것이요, 소인을 만나서는 멀리하고 경계하며 가르침을 청하지도 못할 것이요, 소인을 만나서는 멀리하고 경계하며 물리치지’도 못할 것이니, 양 방면의 손실이 심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여실히 알아 보지 못할까 걱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현우(賢愚)를 알아야만 비로소 "사람은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자신은 그렇지 않은지 스스로 깊이 반성"(4-17) 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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